제주올레 18-1코스 (추자도코스)
2020.11.30.~12.1(1박2일)
추자도 전체 코스가 18.2Km,
하루에 걷기에 좀 긴 코스인데
배시간이 9:30 제주항 출발 10:30 추자항 도착이니(씨월드 고속훼리 www.seaferry.co.kr/ 퀸스타2호)
하루일정으로는 힘들다.
그래서 1박을 해야만 한다.
추자도 이레민박(064-712-3215, 010-4657-1461)에 예약을 했더니,
무거운 가방을 메고 올레길 걷기 힘들다고,
추자항 내릴때 우리 가방을 받아 가신다고 마중을 나오셨다.
다음날은 또 민박 사장님이 우리와 같은 배를 타고 제주로 나가신다며
모든 코스 다 걷고 추자항에서 가방을 받아가라고... 정말 친절하신 사장님
우린 추자도에서도 무거운 가방 없이 룰루랄라~~~
원래는 펜션으로 지은게 아니고, 남자사장님이 건축업을 하시면서 같이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묵게 할 요량으로 지었는데, 이제는 일을 줄여 그런 사람들이 없어 펜션으로 이용한단다.
주변에 식당이 마땅치 않아 저녁과 아침을 펜션에 부탁하면 1인분 만원으로 해 주신다.
주인 사장님의 손맛도 괜찮았고, 여기저기 찾아다니지 않아 편하게 식사도 해결했다.
♥♥사장님 정말 감사했어요 ♥♥
추자도 1박2일 식사 및 숙박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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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시작하면서 바로 만난 사당
예로부터 뭍과 제주 본섬을 오가는 길에 거친 풍랑을 피하기 위해 잠시 들리던 곳 추자도. 최영장군 또한 이런 이유로 추자도를 찾았다고 한다. 제주에 머무른 기간은 30여일. 최영장군은 풍부한 자원인 어장을 활용하지 못해 궁핍하게 살아가는 추자주민을 안타깝게 여겨 그물을 짜고 이를 이용해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추자주민은 보다 풍족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추자도 명당에 세워진 사당. 돌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 만나볼 수 있는 이 사당은 정면으로는 상추자 바다를, 뒤로 돌아가면 군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명소로도 사랑받고 있다.(출처:제주시 홈페이지)
이곳 기꺼산은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오후에 걸궁 풍물놀이 패들이 모여 동.서..남해 용왕님께 마을 주민들의 무사안녕과 풍어만선을 기원하며 기원제를 지내는 곳이란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추자항이 참 알록달록 특이한 항구로 보였다.
(추자도 코스는 크고 작은 산이 몇개인지 모를만큼 많다)
처음 이 벽화를 보면서 말했다.
꼭 타일모자이크 처럼 벽화를 그려 놨다고.
그러다가 만져보니 정말 타일 모자이크 였다!!!
저 사진의 아이는 엄마따라 올레길을 걷는데 벌써 22개나 걸었단다. 나머지 다 완주하고 싶다는 아이~~~
정말 대단하다 !!!
추자항에서 신양항까지는 두 섬의 끝에서 끝 이라 할 정도이다.
그 사이에는 편의점 하나 없다.
유일한 수퍼가 묵리수퍼
이 수퍼에 도착할 때쯤엔 배가 고플때다.
수퍼에서 컵라면이라도 먹어야 할 참인데
1인분에 10,000원짜리 갯바당라면을 수퍼주인이 끓여준단다.
그 소리에 우린 속닥속닥
"배고픈 사람한테 아구~~~심하다 !!! 무슨 라면이 1인분 만원이야 !!!" 했다.
허기진 배를 채울려면 어쩔 수 없어 시켰는데...
비쥬얼이 아주 그럴듯했다.
먹으면서는 만원의 가치 충분하다며 만족했다. ㅎㅎㅎ
갯벌을 제주방언으로 갯바당이라며 그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설명해 주시는데,
원래는 문어가 들어가는데 요즘 조업을 못해서 문어대신 한치를 넣었고,
딱새우에 전복도 네마리, 보말과 배말, 등 여러가지가 들어 있어 국물맛이 끝내줬다.
또한 그 내용물 중에 까사리 라는 해초가 있는데 오독오독 소리가 나며 씹히는 식감이 아주 특별했다.
하도 특이해서 먹다말고 건져서 휴대폰으로 찰칵,,,
혹시라도 이 수퍼 주인이 출타중일 경우 점심을 굶어야 하니, 이 라면을 먹을 작정이라면
꼭 전화 하고 가야할것 같다. (010-6609-4211 묵리수퍼)
갯바당 라면이 충분히 만원의 가치는 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위치가 좀 애매한 거리이기에
이보다 좀 덜 와서, 추자교 쯤에서 요기해야 숙소도착했을때
이른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면 추자항에서 아 · 점을, 신양항에서 저녁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숙소에서의 저녁을 내 맘대로 내 시간에 맞출수는 없었다.
어제는 몇몇 올레꾼이 있었는데 오늘은 영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만난 저 두분은 올레길을 정돈하시는 분이셨다.
그냥 놔 두면 숲이 우거져 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저 예초기로 우리가 걷는 길을 다듬어야 한단다.
저렇게 수고하시는 분이 계시니 우린 편히 올레길을 걷는거였다.
그래서 고맙다고, 사진 찍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멀리서... 누군지 식별하지 못할 만큼... 초상권이란 이런거다...
전날 이른 저녁 먹고 초저녁부터 잠을 잤던 탓에, 이른 새벽에 깨어 다시 잠은 안오고...
휴대폰 오락하고 놀고 있다가 커튼을 젖히는 순간
어머나!!! 우리가 묵었던 방 정면으로 2-3분전에 태양이 바다위로 올라와 버렸다 !!! ㅠㅠㅠ
방안에 앉아서 일출을 볼 수 있었는데...........
하늘에 구름이 없어 오메가를 볼 수 있었을텐데.................................
이레민박 바로 뒷산 꼭대기에 정자가 있다. (젤 위 민박사진 참고)
새벽에 그 정자에 가서 일출을 봤어야 하는데...... 하면서 남편이 무척 아쉬워 했다.
그런데 다시 일정 시작하고 두시간 반쯤 걸어서 진행했는데, 밑을 내려다 보는 순간
어~~~ 어제 우리가 묵었던 이레민박이 바로 쪼~~~기 앞 직선거리로 200m도 안되는 거리에 보였다.
우리는 돌아돌아 걸어서 민박집 뒤 돈대산 정자에 오른 거였다. ㅎㅎㅎ
올레길이 그렇다. 무시하고 직선으로 가면 바로 쪼~~~~~기.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 알렉시오와 제주관노로 유배된 정난주 마리아 부부의 아들인 황경한이 묻혀 있는 곳이다. 황사영은 1775년 유명한 남인가문에서 태어나 1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할 만큼 영특하였다. 그러나 1790년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후 세속적 명리를 버리게 된다.
1801년 신유백해가 일어나자 그는 충북 배론에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썼다 이 백서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체포되고,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으며, 어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는 제주 관노로, 그리고 두 살 된 아들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정난주는 1773년 유명한 남인이요 신자 가문인 정약현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한 샌앙생활을 하였다. 18세 때인 1790년 16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두살의 아들을 가슴에 안고 귀양길에 오른 정난주는 추자도에 이르러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걱정하여 젖내나는 어린것을 예조리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고, 사공들에게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말한다. 대정 관노로 유배된 그녀는 38년간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주민들을 교화하였다. 그래서 노비의 신분이면서도 "서울 할머니"라는 칭송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1838년에 선종하여 대정성지에 묻혀 있다.
갯바위에 놓여진 황경한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어부 오씨에 의해 키워졌으며, 성장한 뒤에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지금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아니하는 풍습도 생겨났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이곳에 묻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보이는 바다로 튀어나온 바위가 바로 두 살 아기가 버려져 울던 장소이다. 지금 제주교구에서는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출처 : 천주교 제주교구 안내판 글
산을 몇개를 넘는 동안 계속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보며 맘 속으로 '예쁘다'를 연신 되풀이한다.
위 사진은 전날, 아래 사진은 다음날,,,
이 외에도 참 많은 반짝이는 바다를 찍었다.
빛내림이 보이게 할려면 사진을 어둡게 찍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이 두 사진이 모두 좀 많이 어두워 보인다.
이게 내 사진실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래 사진은 확실히 빛내림이 보인다. 바로 그 밑 바다의 반짝임도......
그 아름다웠던 바다의 반짝임을 그대로 담아 올 수 있도록 좀더 사진실력을 보강시켜야 겠다고 다짐한다.
산이 허락해야 산에 들 수 있듯이
바람이 허락해야 추자도에 올수 있다.
자연의 조화와 심통을 우리가 어찌 할 수는 없다.
겸허히 받아 들여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세상 살아가는 것 또한 이러한 이치에 부합함을 실감함과 동시에
나이 들어가면서 고개를 숙이는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올레길 걸으면서 다시 한번 되새긴다.